유난히 저녁 공기가 싸늘했다.
오랜만에 함께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전철역으로 향했다.
별다를 것 없이, 그저 일상의 연장선처럼.
적당히 사람들로 붐비는 전철이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나란히 전철에 올랐다.
지금처럼, 그녀와 어깨를 맞대고 전철에 선 건 오랜만의 일이 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창밖으로 스쳐가는 흐릿한 불빛들,
그 모든 익숙한 풍경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익숙했던 순간들이 달리 보였다.
그녀가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
고개를 살짝 숙이며 생각에 잠기는 옆모습,
무심코 나를 부를 때의 그 조용한 목소리.
전에는 몰랐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얼마나 깊이 새겨졌는지를.
그런데 그녀는 아마도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자연스레 나를 향해 기울어지던 그녀가,
그저 무심한 척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사실은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 조만간 결혼해. 좋은 사람이야.”
그녀가 말했다.
너무나도 덤덤하게,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대사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녀도, 그리고 나도, 우리 서로가 그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함께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녀는 현실의 벽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나는 그 거짓말을 깨뜨릴 용기가 없었다.
“잘 가.”
전철문이 열렸다.
그녀는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눈물을 삼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멀어지는 뒷모습, 닫히는 문, 떠나가는 전철.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이 지나갔다.
그리고 내 첫사랑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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