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듯이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자주 만났다.
학창 시절, 서로를 좋아했으면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날들.
그때의 아쉬움을 채우기라도 하듯, 이유 없이 만나고 또 만났다.
"너 예전보다 말이 많아진 거 알아?"
"그래요?"
"응. 예전엔 더 조용했는데."
"누나가 말을 많이 시켜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그녀는 웃었고,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즐거운 듯 보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단순한 ‘누나’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를 ‘동생’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 술잔을 사이에 두고, 흔들리는 그녀
"누나, 요즘 많이 힘들어요?"
"괜찮아."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요."
"넌… 정말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가볍게 웃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힘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그냥… 한잔할까?"
"술이요?"
"응. 너랑은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잖아?"
"…그렇긴 하죠."
우리는 조용한 바에서 마주 앉았다.
술잔이 몇 번 오갔다.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넌 여전히 착하네."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고. 항상 날 신경 써주는 거, 고마워서."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잔을 비웠다.
살짝 떨리는 손끝, 그리고 깊은 한숨.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어딘가 딴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눈빛.
"누나, 오늘따라 좀 이상해요."
"내가?"
"네, 평소보다 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테이블을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어."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항상 강한 사람이었다.
나를 다독이고, 보호하고, 앞서 나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 버스 안,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기대었다
늦은 밤, 우리는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나는 조용히 옆에 앉았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유리에 반사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나, 괜찮아요?"
"응…"
그녀의 대답이 희미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천천히 기대어졌다.
나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가까웠다.
그녀가 이렇게 나에게 기대온 건 처음이었다.
아니,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내게 기대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챙겨주고, 보호하려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내게 기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술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감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기 때문일까.
"…오늘만."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만… 이렇게 기대고 있을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대로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나는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너무 가까웠다.
버스는 조용히 어둠 속을 달렸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랐다.
- 깨져버린 균형, 그리고 다가올 이별
그녀는 술의 힘을 빌려 내게 기대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취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동생’으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싶어졌다.
그렇기에, 이 순간이 지나가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잠든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곧 나를 떠날 거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내 곁에 있는 이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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